[에이블뉴스 김시내 칼럼니스트]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는 요즘, 칼럼을 투고하는 일이 때로는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생각을 정리하고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시간이라 나에게는 작은 휴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글의 재료를 고민하다가, 요즘 반복해서 하고 있는 작업 속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하나의 소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필자는 손 사용이 자유롭지 않아 필기를 하기 어렵다. 그래서 중요한 대화를 할 때면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고 녹음을 한다. 수업 시간에도, 논문 지도를 받을 때도, 연구 인터뷰를 진행할 때도 같은 방식이다. 특히 요즘 진행하고 있는 연구가 대부분 질적 연구이다 보니 인터뷰를 녹음하고 그 내용을 전사하는 작업을 반복하는 일이 많아졌다. 물론 이 과정은 연구윤리를 지키며 연구참여자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동의를 받은 뒤 진행한다.
어느 날 녹음 파일을 다시 들으며 전사를 하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되는 파일이었다. 당시에는 조용한 공간에서 이루어진 대화라고 생각했는데, 녹음된 파일 속에서는 대화 사이사이에 어떤 소리가 계속 섞여 있었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들어온 소음인가 싶었다. 그런데 반복해서 듣다 보니 점점 분명해졌다.

AI 생성 이미지 . ©김시내
그 소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내는 소리였다. 거칠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였고, 숨이 막히는 것처럼 끙끙 앓는 소리였다.
필자는 전신에 경직이 나타나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전신’은 겉으로 보이는 신체뿐 아니라 내부 장기까지 포함한다. 몸 전체의 근육이 스스로 조절되지 않는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근육에 힘이 들어가고, 말을 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도 경직이 심해진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가만히 있어도 근육이 굳어지면서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워진다.
그런데도 나는 그동안 이것을 특별히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 내 몸의 상태는 매일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날에는 말이 술술 나와 수다쟁이가 되고, 어떤 날에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조용한 사람이 된다. 어떤 날에는 숨 쉬는 것이 편안해서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들을 몰아서 하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버거워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미루게 된다. 어떤 날에는 잘 먹을 수 있어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고, 어떤 날에는 삼키는 것조차 쉽지 않아 그저 그런 날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몸의 상태가 마치 카멜레온처럼 매일 달라지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특별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매일 같은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런데 녹음 파일을 반복해서 듣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몸의 장애가 중증이라는 사실이었다. 한 시간짜리 녹음 파일에는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내 숨소리가 계속 담겨 있었다. 숨을 거칠게 쉬는 소리와 경직으로 인한 끙끙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소리만 들으면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녹음 속에서 나는 웃으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이 낯설었다. 내가 알고 있던 나의 몸과 녹음 속에 담겨 있던 나의 몸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내 몸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몸은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고, 그 신호가 소리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소리들을 특별하게 인식하지 않은 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숨이 거칠어지는 순간도, 몸이 버거워하는 순간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상태로 넘기며 일상을 이어왔다. 그런데 녹음 파일 속에서 그 소리들을 다시 마주하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순간을 그렇게 흘려보내 왔는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내 몸에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소리가 나온다. 그리고 그 소리들은 때때로 예상하지 못한 오해의 장면을 만들기도 한다. 음식을 먹을 때는 턱 근육이 조절되지 않아 치아가 심하게 부딪히고, 근육이 갑자기 튀어 목이 뒤로 넘어갈 때는 뼈가 우두둑 어긋나기도 한다. 교수님이나 여러 사람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할 때 위장 근육이 조절되지 않아 나도 모르게 트림이 나오기도 했고, 조용한 극장에서 음료를 마실 때 꿀꺽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려 민망했던 적도 있다. 그때마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으로 전달될까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소리들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내 몸이 스스로 내고 있는 신호에 가깝다.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몸의 상태와 조건이 드러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소리를 쉽게 ‘예의’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조용히 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장애의 특성을 모르면 이런 장면들은 쉽게 오해로 이어질 수 있다. 예의가 없는 사람, 소음을 만드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험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발달장애인의 경우 기분이 좋거나 긴장, 감각 자극으로 인해 상동행동이 나타나면서 소리가 나기도 하고, 농인의 경우 수어를 사용할 때 손이 스치는 소리나 입모양(mouthing)과 함께 자연스럽게 발성이 동반되기도 한다. 휠체어나 전동 보조기기를 사용할 때는 모터 소리가 나고, 목발을 짚을 때는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사실 몸에서 나는 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트림이나 하품, 기침처럼 몸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소리도 있고, 움직임이나 호흡에서 생겨나는 소리도 있다. 다만 어떤 몸에게는 그 소리를 비교적 쉽게 조절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어떤 몸에게는 그것이 쉽지 않다. 몸의 작동 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게 된다. 공공장소에서 다양한 몸의 소리가 더 많이 드러날 필요가 있다고.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공공 공간은 ‘조용함’을 기본 규범으로 전제하고 있다. 극장, 도서관, 강의실, 회의실 같은 공간에서는 몸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가능한 한 억제하는 것이 예의로 여겨진다. 기침을 참거나, 하품을 손으로 가리거나, 전화 통화를 위해 자리를 잠시 벗어나는 행동은 모두 이런 사회적 규범 속에서 자연스럽게 익혀진 것이다.
문제는 이 규범이 모든 사람의 몸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몸의 소리를 조절하는 것이 비교적 쉬운 일일 수 있지만, 어떤 몸에게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수도 있다. 근육의 경직으로 인해 숨소리가 거칠어질 수도 있고, 신체 조절의 어려움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소리가 갑자기 튀어나올 수도 있다. 보조기기나 이동 장비가 만들어내는 소리 역시 몸의 움직임과 함께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이때 문제는 소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회의 기준이다. 조용함을 기본값으로 설정한 사회에서는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몸이 쉽게 ‘예의 없는 사람’이나 ‘소음을 만드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시선을 조금만 바꾸어 보면, 그 소리들은 무례함의 표현이 아니라 몸의 작동 방식이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신호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공공장소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몸의 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몸이 조금 다르게 움직이고, 숨 쉬는 방식이 조금 다르고, 이동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소리들. 그런 소리들이 공공 공간에서 낯선 예외가 아니라 일상의 일부로 경험될 때, 우리는 한 가지 기준으로만 설계된 몸의 규범을 조금씩 느슨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더 이상 ‘조용한 몸만 허용되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몸이 함께 존재하는 곳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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