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뉴스 박지주 칼럼니스트】돌봄이라는 단어가 노동자의 입장에서 갖는 의미와 그 서비스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경험하는 심리적·정신적 위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나는 그 차이 안에 숨어 있는 위계를 이야기하고 싶다.
서비스를 받는 사람을 누군가가 관리하고 보호해야 하는 대상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사람은 자기 삶의 주체에서 한 발짝 밀려난다. 나는 그 위치에 동의하지 않는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잘 돌봐주는 삶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결정하고, 그 결정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필요한 힘을 지원받는 삶이다.
대상이 될 것인가, 주체가 될 것인가
사회적 서비스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단순하다. 나는 서비스의 대상인가, 주체인가.
내 삶을 내가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사람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서비스 안에서 정해진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인가.
이 차이는 사소하지 않다. 활동지원 서비스나 요양보호 서비스처럼 서비스를 받는 사람과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이 만나는 현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누가 결정하는가.
누가 선택하는가.
누가 그 선택을 수정할 수 있는가.
결국 이것은 힘의 문제이고, 정치의 문제다.
예를 들어 활동지원 현장에서 이용자가 오늘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결정했는데도 "그건 위험하다", "원래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이유로 계획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
물론 안전은 중요하다. 그러나 안전을 이유로 이용자의 선택을 언제든 대신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이용자의 삶을 지원해야 할 사람이 이용자의 삶을 대신 결정하기 시작하는 순간, 지원은 통제가 될 수 있다.
나는 바로 그 지점을 경계한다.
'돌봄'이라는 말이 불편한 이유
특히 돌봄 노동에는 여성이 많이 종사한다. 그래서 나는 '돌봄'이라는 단어가 오랫동안 여성에게 요구해온 역할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돌보고, 챙기고, 보호하고, 알아서 해주는 사람.
이러한 역할은 누군가에게는 따뜻함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장애인의 입장에서 그것이 서비스의 기본 관계가 될 때에는 다른 문제가 생긴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보다 '당신이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가 앞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돌봄'보다 '지원'이라는 말을 선택하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지원은 노동자를 낮추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노동의 전문성과 이용자의 자기결정권이 함께 존중되는 관계를 만들자는 이야기다.
개인적 지원(personal assistance)의 핵심은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돌봄이란 그 단어자체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은 제도의 이름보다 그 안에서 서비스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내가 당신을 돌봐준다'가 아니라 '당신이 결정한 것을 당신의 방식으로 할 수 있도록 내가 지원한다.' 나는 그 관계를 원한다.
자기결정이 어려운 사람에게도 지원은 필요하다
물론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인지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의사표현이 어렵고, 혼자 생활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돌봄'이 더 적절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럴수록 질문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결정이 어렵다고 해서 결정권을 모두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말로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면 표정과 몸짓, 행동과 반응, 평소의 선택과 생활방식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그 사람의 의사를 최대한 발견하고, 함께 결정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지원된 의사결정(supported decision-making)이 중요한 이유다.
결정을 대신하는 것과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사람의 삶을 대신 결정하는 것이고, 후자는 그 사람이 가능한 한 자신의 삶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장애가 크다고 해서 주체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의사표현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것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부족한 부분을 누군가가 대신 채워주는 서비스만이 아니다.
이동하고, 배우고, 일하고, 사람을 만나고, 문화를 누리고, 사랑하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지원이다.
그래서 활동지원은 단순히 '일상생활을 도와주는 서비스'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돌봄이 아니라 개인적 지원으로 나가야 한다. 자립과 사회참여를 가능하게 하고, 자기결정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개인적 지원이어야 한다.
지원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지원받는 당사자가 가장 먼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원하는 사람은 그 결정을 존중하면서 필요한 일을 함께 수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물론 모든 선택이 언제나 안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험하다는 이유만으로 장애인의 선택을 쉽게 빼앗는 사회라면, 그 사회가 장애인을 보호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장애인의 삶을 통제하고 있는 것인지 묻게 된다.
삶의 힘을 당사자에게
나는 '돌봄'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따뜻하게 살피고 보살피는 돌봄의 가치까지 부정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내가 거부하는 것은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장애인을 보호와 관리의 대상으로 위치시키는 관계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가 나를 얼마나 잘 돌봐주는가가 아니다. 내 삶을 내가 얼마나 결정할 수 있는가이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다. "이 사람을 어떻게 잘 돌볼 것인가?" 이 질문을 이제는 바꿔야 하지 않을까.
"이 사람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우리는 무엇을 지원해야 하는가." 더 나아가 "이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가."
제도의 이름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제도 안에서 누가 결정하고 있는가를 다시 묻는 것이다.
나는 돌봄받는 사람으로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삶을 선택하고, 그 선택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을 받고 싶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개인적 지원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의 선의로 베푸는 서비스가 아니라, 장애인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보장받아야 할 권리다.

나는 돌봄이란 단어를 거부한다.(AI 생성 이미지) ©박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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