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활용 이미지. ©김양희
AI 활용 이미지. ©김양희

【에이블뉴스 김양희 칼럼니스트】장애계는 늘 차별과 배제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토록 강조해온 ‘차별 반대’의 원칙이 젠더 앞에서는 멈춰 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성 장애인이 겪는 복합적 차별은 장애 운동 안에서 여전히 주변부로 밀려나고, 젠더 이슈는 늘 “나중에 다룰 문제”로 취급된다. 바로 이것이 장애계가 스스로 보지 못하는 블라인드 스팟(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이다.

장애 문제를 말할 때 성별이라는 요소가 쉽게 삭제되고, 장애여성의 삶에 깔린 중층적 차별 구조는 분석의 대상에서조차 제외되곤 한다. 성별을 지우는 순간, 장애여성이 겪는 현실의 절반은 설명되지 않는다. 장애여성이 경험하는 폭력·빈곤·고립 문제는 단순히 ‘장애’ 때문이 아니다. 여성이라는 사회적 위치에 부여된 규범과 기대가 장애와 결합하면서, 차별은 더 복잡하고 깊게 뿌리내린다.

예컨대 장애여성의 성폭력 피해율은 비장애여성보다 현저히 높음에도, 수사·지원 체계는 여전히 ‘보호 중심’에 머물러 있고, 피해자의 의사결정 능력 자체를 문제 삼는 시선도 강하다. 이는 구조적 차별임에도 젠더 분석이 빠지면서 결국 개인의 불행이나 돌발 사건으로 축소된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위치가 사라진 정책은 현실성을 잃고, 그 빈틈은 늘 당사자에게 전가된다.

노동 영역에서도 성별 차이는 명확히 드러난다. 여성 장애인의 고용률은 남성보다 낮고, 취업 기회도 제한적이며, 전통적 여성직종으로만 수렴되는 경향이 크다. 임금 수준도 낮아 경제적 자립은 훨씬 더 어렵다. 이는 능력이나 적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여성에게 오래전부터 부여해온 역할 규범이 장애여성에게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책은 “장애인의 평균 고용률”이라는 숫자에 갇혀 성별 내부의 격차를 보지 않는다. 평균 중심의 정책은 결국 불평등을 숨기고 유지하는 장치가 된다.

무엇보다 돌봄 문제는 젠더 관점 없이는 결코 설명할 수 없다.

활동지원이 부족하면 장애인의 성별과 관계없이 결국 가족에게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 돌봄을 책임지는 사람은 대부분 어머니·아내·딸 등 여성 가족 구성원이다. 이로 인해 여성은 경제활동을 포기하거나 축소해야 하고, 장애인은 제도적 지원 부족을 가족의 희생으로 보충해야 하는 악순환 속에 놓인다. 돌봄을 제공하는 여성은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돌봄을 받는 장애인은 자립권이 제한된다. 이것은 단순한 가정 내 역할 분담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책임져야 할 돌봄을 여성에게 전가해온 구조적 문제다.

그러나 장애계 내부에서도 이러한 젠더 불평등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젠더를 말하면 “장애가 더 큰 문제”라며 성별을 뒤로 미루는 문화가 존재한다. 하지만 젠더 관점을 배제한 장애운동은 사실상 장애인의 절반만을 대변하는 운동이다. 장애여성 단체들이 오래전부터 “장애여성은 독립된 의제를 가진다”고 주장해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특별한 ‘추가 요구’가 아니라, 지금까지 보이지 않게 지워져 있던 보편적 권리를 복원하자는 요구다.

젠더 관점이 빠진 정책은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존의 불평등을 굳건히 유지한다. 성별에 따른 조건과 경험을 고려하지 않은 평등은 평등이 아니다. 평균값 중심의 정책 속에서 주변부는 더 멀리 밀려나고, 장애여성은 그 끝자락에 서 있게 된다.

이제 장애계는 스스로 묻고 직면해야 한다.

“누구의 목소리가 더 쉽게 지워지는가?”

“누구의 경험이 여전히 보이지 않는가?”

젠더 관점은 장애 문제의 부가 요소가 아니라, 장애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틀이다. 장애계가 진정한 변화를 원한다면, 먼저 스스로의 사각지대를 바라보고 그 빈틈을 채우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장애운동은 더 넓고 깊은 연대의 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