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로 순천여행. ©하석미
휠체어로 순천여행. ©하석미

겨울바람 속에 만난 뜻밖의 봄날

【에이블뉴스 하석미 칼럼니스트】겨울바람이 제법 매서울 거라 예상하며 두툼한 옷가지로 무장하고 나섰다비 소식까지 있어 걱정했지만순천역에 내리자마자 마주한 하늘은 오히려 다정했다바람 한 점 없이 포근한 공기괜히 준비만 철저했던 하루의 시작이 묘한 설렘으로 다가왔다오늘 소개할 곳은 100년 전통의 '순천 웃장'과 추억이 고스란히 박제된 '순천 드라마 촬영지휠체어를 타고 개천길을 달려 시장통으로 향하는 길그 설레는 여정으로 시작됐다.

100년 전통의 온기, 순천 웃장. ©하석미
100년 전통의 온기, 순천 웃장. ©하석미

100년의 시간을 구르는 바퀴삶의 허기를 채워온 순천 웃장

웃장에 들어서니 장날이 아님에도 시장 특유의 활기가 가득했다이곳은 1920년대 순천 읍성 밖 북문 근처에 자연스럽게 터를 잡으며 시작된 100년 역사의 현장이다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남도의 풍부한 산물을 주고받으며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이곳은단순한 시장을 넘어 순천의 근현대사를 묵묵히 지켜온 증인이기도 하다.

휠체어가 미끄러지듯 나아갈 만큼 매끄럽게 잘 닦인 시장 길을 따라 이동하다 발견한 옛날 짚신 더미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옛날 보부상들이 드나들던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예전엔 짚신을 신고 고개를 넘던 이들이 쉬어가던 자리에이제는 내가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그 시간을 잇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어머님께 드릴 알록달록한 김장 조끼 하나를 골라 휠체어 옆에 끼워 넣으니 마음까지 든든했다세련된 백화점은 아니지만,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손때 묻은 물건들이 건네는 인사가 참 따뜻했다웃장은 그렇게 오래된 역사의 향기와 사람 사는 냄새를 머금은 채여행자의 바퀴 자국마다 다정한 이야기를 채워주고 있었다.

좁은 공간 너머 마주한 남도의 보물 같은 성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요휠체어 바퀴를 굴려 시장 골목을 어슬렁거리는데낯선 이방인의 기웃거림이 싫지 않았는지 지나가던 청년들이 먼저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어디 찾으세요?"라는 물음에 옳다구나 싶어 "혹시 여기 맛집이 어디 있을까요?"라고 되물었다그러자 청년들은 상세한 설명 대신 "저 골목 안쪽 건물로 들어가서 백반집을 한번 찾아보세요"라는 아주 쿨하고도 흥미진진한 미션을 던져주었다.

물어물어 도착한 식당 앞처음에는 가게 입구가 생각보다 작고 좁아 보여 휠체어를 탄 내가 들어갈 수 있을까 싶어 잠시 주춤했다그때 사장님이 환한 미소로 나오시더니 직접 길을 터주며 안으로 안내해 주셨다손님이 몰리는 복잡한 시간에는 조금 어려울 수 있겠지만한가한 시간대라면 휠체어 두 대는 거뜬히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는 아담하고 정겨운 공간이었다.

남도의 예술 '만찬'. ©하석미
남도의 예술 '만찬'. ©하석미

자리에 앉자마자 상 위에 차려진 백반은 그야말로 '남도의 예술'이었다바로 구워낸 갈치구이는 바삭하고 고소한 향으로 밥도둑 역할을 톡톡히 했고겨울 시금치는 별다른 양념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도 고소한 기름 냄새와 특유의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졌다특히 겨울 무를 숭덩숭덩 썰어 넣은 고등어조림은 무의 달큰함과 생선의 감칠맛이 기가 막히게 어우러졌다. '비린 맛을 어찌 이렇게 감쪽같이 없앴을까?' 궁금해하며 숟가락을 놀리다 보니어느새 밥공기는 바닥을 보이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사장님여기 밥 한 공기 더 주세요!"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여행의 70%는 밥이라는데이날은 친절한 사장님과 직원분들의 따뜻한 배려 덕분에 그 맛이 두 배세 배로 깊어졌다칼럼을 쓰는 지금도 그때의 밥상을 떠올리면 입안에 침이 고여 당장이라도 다시 순천으로 달려가고 싶어진다좁은 문턱을 넘어 마주한 그 넉넉한 밥상은 이번 여행 중 가장 완벽한 성찬이자가슴 뜨거운 남도의 온기였다.

버스 안에서 마주한 천 원의 무게

버스 안에서~. ©하석미버스 안에서~. ©하석미

다음 목적지인 드라마 촬영지로 가기 위해 장애인 콜택시를 불렀으나 대기자가 많아 대신 저상버스를 기다렸다대기 시간이 긴 택시보다 운 좋게 바로 도착한 버스에 오르는 순간버스를 선택했다는 것이 이번 여행의 '신의 한 수'였다.

창밖 풍경을 즐기던 중버스가 멈춰 서고 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올라타셨다할아버지의 손에는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이 꼭 쥐어져 있었다할아버지는 기사님께 "이걸로 차비 내면 안 되나..." 하고 조심스레 물으셨다하지만 요즘 버스는 대부분 카드 전용 시스템이라기사님은 단호하게 다른 승객에게 카드로 결제해달라고 부탁하라며 고개를 돌리셨고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당황한 기색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계셨다.

그 당황스러운 공기를 깨고 제가 먼저 입을 뗐다. "할아버지제가 해드릴게요!" 내 카드를 드려 '하고 찍히자순간할아버지와 할머님의 얼굴에는 말간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할머님은 극구 사양하는 제 손에 한사코 그 천 원짜리를 쥐여주셨다. "이건 꼭 받아야 한다"며 제 손을 꼭 잡던 그 거칠고도 따뜻한 손길에서사람 사는 세상의 뭉클한 온도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사는 재미가 이런 것일까휠체어에 앉은 나도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 될 수 있다함께 공존한다는 것은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의 온기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일이다휠체어를 타고 다니면 도움을 받을 때도 많지만나 또한 누군가에게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나를 더 당당하게 여행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물론그 감동의 여운을 즐기기도 잠시기사님의 운전 실력은 마치 롤러코스터 같아 중간중간 몸이 붕 뜨는 기분에 움찔움찔하며 무서움을 견뎌야 했지만요. ^^ 그렇게 스릴 넘치고도 마음 따뜻했던 여정 끝에 드디어 순천 드라마 촬영지의 입구에 도착했다.

과거로 떠나는 시간 여행의 이정표, 순천 드라마 촬영장. ©하석미
과거로 떠나는 시간 여행의 이정표, 순천 드라마 촬영장. ©하석미

과거의 골목을 기웃거리는 즐거움드라마 촬영지

순천 드라마 촬영지는 단순한 세트장을 넘어 우리가 지나온 시대를 통째로 박제해 놓은 거대한 기억의 저장소였다이곳은 본래 군부대가 있던 자리였으나, 2006년 드라마 <사랑과 야망>을 시작으로 <에덴의 동쪽>, <제빵왕 김탁구등 수많은 명작이 탄생하며 지금의 터를 닦았다고 한다. 1960년대 순천 읍내부터 70년대 서울 봉천동 달동네, 80년대 번화가까지 세 가지 테마로 구성된 국내 최대 규모의 촬영장이다.

특히 이곳은 장애인과 노약자 등 누구나 제약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환경을 정비한 '열린 관광지'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입구의 완만한 경사로와 주요 도로의 평탄한 보행로는 휠체어 바퀴를 굴리는 손길을 한결 가볍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