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뉴스 김시내 칼럼니스트】 제도는 결코 당연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활동지원 역시 마찬가지다. 타인의 노동과 돌봄을 통해 하루가 이어진다는 사실 앞에서 감사와 고마움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감정이 제도의 책임을 대신하는 언어로 작동하는 순간, 우리는 그 표현을 한 번 더 점검해야 한다. 감사와 고마움은 관계의 언어이지, 공적 체계를 대체할 수 있는 원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활동지원사 복이 있으시네요.
이 말에는 분명 호의가 담겨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표현은 활동지원을 ‘권리’가 아니라 ‘운’의 문제로 전환한다. 제도가 안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면 굳이 등장하지 않았을 말이다. 활동지원이 언제든 중단될 수 있고, 매칭은 불확실하며, 기준은 일관되지 않다는 전제가 깔려 있을 때에만 이 말은 자연스럽게 발화된다. 그 결과 활동지원은 공공서비스가 아니라, 사람을 잘 만났는지 여부로 설명되는 일이 된다.
활동지원이 불안정해질수록, 문제의 위치는 서서히 이동한다. 매칭의 어려움을 말하는 순간, 제도의 작동 방식이나 인력 배치 기준이 점검되기보다는 다른 방향의 반응이 먼저 등장한다. 왜 제도는 안정적으로 인력을 연결하지 못하는지, 이 불안정이 반복되는 구조적 이유는 무엇인지는 질문되지 않는다. 대신 “그래도 좋은 분을 만나지 않았느냐”는 말이 뒤따른다.
이 표현은 단순한 위로처럼 보이지만, 그 기능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이 말은 매칭의 불안정성을 제도의 책임으로 남겨두지 않고, 개인의 경험 차원으로 환원한다. 구조적 결함은 점검의 대상에서 빠지고, 당사자의 경험은 ‘운이 좋았는지’의 문제로 재해석된다. 그렇게 제도의 실패는 구조적 문제로 남지 않고, 개인의 사례 속으로 흡수된다. “좋은 분을 만났다”는 말은 제도의 책임을 묻는 질문을 차단하고, 불안정한 구조를 제도 바깥의 행운으로 치환하는 언어로 작동한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책임은 자연스럽게 개인에게 귀속된다. 불편을 이야기하면 요구가 많다는 평가가 덧붙고, 문제를 제기하면 예민하다는 시선이 향한다. 이때 문제는 서비스의 구조가 아니라, 그것을 감내하는 사람의 태도로 다시 쓰인다. 제도가 채우지 못한 공백은 당사자의 인내와 관계 관리 능력으로 메워진다. 일정이 어긋나도 이해해야 하고, 반복되는 불편 앞에서도 관계가 틀어질까 말을 삼키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공공서비스의 실패는 구조적 문제로 호출되지 않는다. 제도가 제공하지 못한 안정성은 개인의 성숙함과 인내심으로 대체되고, 체계가 져야 할 책임은 당사자의 성향 문제로 환원된다. 결국 서비스의 질은 행정의 기준이나 제도의 완성도가 아니라, 이용자가 얼마나 조용히 견뎌냈는지에 따라 평가된다. 불편을 견디는 순간 ‘괜찮은 이용자’가 되고, 질문하는 순간 ‘요구가 많은 사람’이 된다. 이 체계에서 침묵은 순응으로, 발언은 문제로 기록된다. 공공서비스의 기준은 권리가 아니라, 침묵의 정도로 작동한다.
이 구조는 활동지원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활동지원사는 제도의 보호를 받는 노동자가 아니라, ‘좋은 마음으로 함께해 주는 사람’으로 호명된다. 역할과 책임이 명확히 규정된 노동자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더 해줄 수도 있고 덜 해줄 수도 있는 존재로 인식된다. 무엇이 업무이고 무엇이 호의인지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돌봄 노동은 기준이 아니라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영역으로 밀려난다.

ChatGPT. @김시내
그 결과 활동지원사는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조정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어디까지가 업무인지, 어디부터가 배려인지 매번 판단해야 하고, 그 기준은 제도가 아니라 관계의 분위기와 개인의 성향이 된다.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면 차갑다는 평가를 받고, 한 번 더 해주면 그것이 곧 다음의 기준이 된다. 선의는 선택이 아니라, 암묵적인 의무처럼 작동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이용자 역시 요구를 조심하게 된다. 정당한 요청조차 관계를 해칠까 망설이게 되고, 불편함을 말하는 순간 ‘예민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지 계산하게 된다. 활동지원사는 선의를 증명해야 하고, 이용자는 관계를 관리해야 하는 구조 속에서 돌봄은 점점 말하기 어려운 영역이 된다. 제도의 부재는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의 긴장을 만들고, 돌봄은 체계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 간 관계의 문제로 축소된다.
활동지원이 ‘호의’처럼 작동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기준을 세우지 않은 결과이며, 책임을 제도 바깥으로 밀어낸 구조다. 동일한 돌봄 노동임에도 교육과 경력 인정, 처우 기준은 분절되어 있고, 서비스의 연속성과 안정성 역시 개인의 사정과 관계 유지 능력에 맡겨져 있다. 기준이 없으니 문제를 말할 언어도 없고, 체계가 없으니 불편은 늘 개인의 감정 문제로 처리된다. 이것이 활동지원이 반복적으로 정책의 주변부에 머물며, 구조적 문제로 충분히 논의되지 않는 이유다.
감사와 고마움의 마음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 감정이 제도의 책임을 대신하는 순간이다. 공공서비스는 호의로 유지되는 관계가 아니라, 기준과 체계로 보장되어야 할 삶의 조건이다. 과도한 불안정과 결핍을 감사로 버텨야 하는 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그래도 다행이다”라는 말로 유지되는 삶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그 사회에서 돌봄은 끝내 권리가 아니라,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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