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의 민주화와 당사자주의의 결합
【에이블뉴스 김경식 칼럼니스트】 우리는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믿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기술의 도움이 가장 절실한 이들에게 시장의 기술은 여전히 멀고 비싸기만 한 것이 현실이다.
전통적인 보조공학기기 시장은 여전히 전문가와 기업이 주도하는 공급자 중심 체계이다.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는 기기들은 높은 개발비와 좁은 시장성이라는 이유로 고가로 책정되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장애 당사자의 경제적 부담이나 국가 재정의 한계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 ‘스스로 만드는(DIY)’ 보조공학기기의 등장은 이러한 수동적 수혜의 구조를 깨뜨리고, 기술의 민주화와 당사자주의를 결합한 새로운 복지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생산 양식의 전환, 전문가의 독점에서 ‘당사자의 참여’로
기존의 보조공학기기 전달체계 모델이 표준화된 제품을 대량 생산하여 보급하는 방식이었다면, DIY 보조공학은 개인 맞춤형(Personalization)을 핵심 가치로 삼고 있다.
과거에는 기업과 전문가가 설계한 규격에 사용자가 자신의 몸을 맞춰야 했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불편함은 ‘감수해야 할 몫’으로 여겨졌던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용자와 가족, 그리고 지역사회의 메이커(Maker)들이 제작 주체로 전면에 나섬과 동시에, 오픈소스(Open-source)로 공유되는 설계도는 특허와 독점으로 보호되던 기술 장벽을 허물었으며, 3D 프린팅과 저가형 하드웨어는 유통과 개발 단계에서 발생하는 거품을 걷어내고 있다.
결과적으로 수백만 원을 호가하던 기기들이 단돈 몇만 원의 재료비만으로 당사자의 신체 조건에 맞춰진 ‘세상에 단 하나뿐인 도구’로 재탄생하는 것이 가능한 시대가 된 것이다.
선진 외국의 혁신 사례와 정책적 전환
해외에서는 이미 DIY 보조공학을 공공복지의 보완재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캐나다의 ‘Makers Making Change(MMC)’는 비영리 단체가 주도하여 당사자와 자원봉사 메이커를 연결하고, 정부는 마이크로 그랜트(Micro-grants)를 통해 기술 기반의 사회 공헌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TOM(Tikkun Olam Makers)’ 역시 ‘메이크아톤(Makeathon)’을 통해 전 세계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기술의 선순환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국가 복지 정책의 패러다임을 ‘물건 공급’에서 ‘솔루션 지원’으로 바꾸고 있다. 영국의 ‘개인예산제(Personal Budgets)’는 장애인이 예산 사용의 자율성을 갖고 DIY 방식의 비표준화 기기 제작 비용을 구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국립재활원을 중심으로 ‘보조기기 열린플랫폼’을 구축하여 공공 주도의 오픈소스 연구개발 체계를 가동하는 등 의미 있는 진전을 보이고 있다.
'만들 권리'를 위한 교육 체계의 확립
하지만 기술과 도면이 공유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DIY 보조공학이 진정한 권리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장애 당사자가 3D 프린팅과 모델링 기술을 직접 습득할 수 있는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기술은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사람에게만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디지털 교육은 일반적인 취업 역량에 치중되어 있어, 장애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보조공학 교육 프로그램은 턱없이 부족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당사자가 직접 3D 설계 소프트웨어를 다루고 프린터를 조작할 수 있도록 하는 ‘접근성 높은 기술 교육 체계’는 단순히 도구를 만드는 법을 넘어, 자신의 신체적 불편함을 공학적으로 해석하고 대안을 설계하는 능동적 시민을 길러내는 과정인 것이다. 이는 장애인 직업재활의 범위를 '단순노동'에서 '창의적 메이커'로 확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 본다.
기술적 권리가 곧 시민권이다
결국, DIY 보조공학기기는 단순한 비용 절감을 넘어선 ‘복지 정치의 확장’이다. 장애인이 자신의 삶을 보조하는 기술을 스스로 관리하고, 더 나아가 직접 설계하고 생산할 수 있는 ‘기술적 주권(Technological Sovereignty)’을 확립하는 가장 확실한 무기인 것이다.
사회복지학적 관점에서 이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우려했던 전문가 집단의 지식-권력에 의한 신체 통제에서 벗어나, 당사자가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는 ‘자기 통치’의 실현이기도 하다.
기술이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고, 그 흐름의 물길을 당사자가 직접 낼 수 있을 때 기술은 비로소 인권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국가와 사회는 이제 완제품의 교부를 넘어, 당사자가 스스로 기술을 배우고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플랫폼’과 ‘교육권’을 보장해야 한다.
DIY 보조공학에 대한 정책적 지지와 교육 체계 확립은 장애인의 자립을 시혜적 복지에서 시민적 권리의 영역으로 격상시키는 결정적인 이정표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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