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뉴스 김경식 칼럼니스트】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다." 10여 년 전 한국 정치권을 뒤흔들었던 이 선언은 안타깝게도 2026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논쟁거리다.
우리는 왜 '공짜 점심'의 유혹에 빠지는가
정치는 표를 먹고 살며, 증세는 표를 깎아 먹는 '독이 든 성배'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국민의 지갑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국가의 보살핌은 늘리겠다는 이 마법 같은 약속은 선거철마다 되풀이되는 '정치적 상품'이다.
그러나 사회복지학의 렌즈로 들여다본 복지는 결코 공짜로 얻어지는 열매가 아니다. 그것은 시민들이 서로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합의한 '연대의 비용'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학문적 근거와 현실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증세 없는 복지’가 왜 단순한 수사를 넘어 사회적 기만인지,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진정한 복지국가의 경로는 어디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에스핑-안데르센의 경고: 한국은 어디에 서 있는가?
복지국가 연구의 권위자 고스타 에스핑-안데르센은 복지국가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자유주의 모델(미국 등): 시장 중심의 복지, 엄격한 자산조사, 낮은 탈상품화(저부담-저복지).
보수주의/조합주의 모델(독일 등): 사회보험 중심, 가족의 역할 강조, 지위 유지 중심(중부담-중복지).
사회민주주의 모델(북유럽): 보편적 서비스, 높은 탈상품화, 국가의 전면적 책임(고부담-고복지).
대한민국은 과거 경제 성장을 위해 복지를 도구화했던 '생산적 복지(Productivist Welfare)' 국가에서 현재는 급격히 복지 지출이 늘어나는 과도기에 있다.
문제는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 이다. 국민의 복지 요구 수준(사회민주주의적 지향)은 높아지는데, 조세 부담 수준(자유주의적 현실)은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에스핑-안데르센의 이론에 따르면, 복지 수준은 반드시 그 사회의 조세 구조 및 노동 시장과 결합 되어야 지속 가능하다.
증세 없는 복지’는 결국 자유주의적 조세 구조로 사회민주주의적 결과를 얻겠다는 이론적 모순인 것이다.
이 간극을 메우지 못하면 복지국가는 '중부담-중복지'로 나아가기도 전에 재정 고갈과 서비스 질 저하라는 덫에 걸리게 돨 것이다.
사회적 자본과 조세 저항의 심리학: 왜 우리는 세금을 '벌금'이라 느끼는가?
왜 국민들은 복지 확대에는 찬성하면서 증세에는 저항할까? 그 핵심은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 특히 정부와 동료 시민에 대한 '신뢰'의 결핍에 있다.
사회복지학에서 조세 저항은 단순한 이기주의의 결과가 아니다. 내가 낸 세금이 투명하게 운영되고, 언젠가 내가 어려울 때 반드시 혜택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호혜성의 신뢰'가 부족할 때 조세 저항은 극대화되는 결과를 낳는다.
수직적 신뢰: 정부가 내 세금을 낭비하지 않고 필요한 곳에 효율적으로 쓸 것이라는 믿음.
수평적 신뢰: 다른 부유층이나 기업들도 나만큼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있다는 형평성에 대한 믿음.
'증세 없는 복지' 담론은 이러한 신뢰 자본을 쌓기보다, "세금 안 올려도 다 할 수 있다"는 거짓말로 사회적 합의의 기회를 박탈한다.
정직하게 증세를 논의하고 그 혜택을 시민들이 체감하게 하는 '복지 효능감'을 강화하는 것만이 조세 저항을 넘어서는 유일한 길이다.
기본소득 vs 기존 사회보장: 재정적 진실 게임
최근 ‘증세 없는 복지’의 또 다른 대안으로 기본소득(Basic Income) 논의가 활발하다. 일각에서는 기존의 복잡한 복지 제도를 통폐합하면 증세 없이도 기본소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재원 조달의 구조: '분산형 기여' vs '집중형 조세’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돈을 어디서 가져오는가"이다. 기존 사회보장 체계는 다원적 재원 구조를 가진다.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처럼 개인이 내는 '보험료(기여금)'와 국가가 일반 세금에서 지원하는 '국고지원금'이 결합된 형태다. 이는 "내가 낸 돈으로 내가 보호받는다"는 사회보험의 원리와 국가의 공적 책임이 조화를 이룬다.
반면, 보편적 기본소득은 기여금의 개념이 희박하다. 전 국민에게 조건 없이 지급해야 하므로, 기존 예산을 뛰어넘는 막대한 규모의 일반 조세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탄소세, 데이터세, 지세(토지세) 같은 새로운 목적세를 신설하거나 대대적인 소득세 인상이 불가피한 '조세 중심 구조'를 띈다.
재분배 방식과 타겟팅: '위험 대응' vs '권리 보장’
두 제도는 "누구에게, 언제 줄 것인가"라는 철학에서 갈라진다.
기존 체계는 실업, 질병, 노령, 빈곤 등 특정한 '사회적 위험'이 발생했을 때 그 대상에게 자원을 집중한다. 즉, 도움이 가장 절실한 사람에게 더 많이 주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재정의 '배분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기본소득은 위험 발생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시민에게 동일한 금액을 배분한다. 이는 까다로운 심사 과정을 없애 복지 사각지대를 완전히 해소하고 시민의 '보편적 권리'를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