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뉴스 이동욱 칼럼니스트】우리는 흔히 진단을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진단은 종종 또 다른 공백의 시작이 된다.

발달장애, 뇌손상,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이후, 당사자와 가족이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이 질문에 답해주는 시스템은 의외로 많지 않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미국 공공 의료·교육 시스템 속 작업치료(Occupational Therapy)의 역할이 드러난다.

진단은 끝났지만, 삶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의료 시스템은 진단에 강하다. DSM, ICD, 신경영상, 검사 배터리까지 진단을 내리는 과정은 정교하다. 하지만 진단 이후의 삶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침묵한다.

특히 다음 세 집단에서 이 공백은 더욱 분명하다.

  • 발달장애 아동: 진단 이후 학교·가정·지역사회 적응의 단절

  • 뇌손상 성인: 퇴원 이후 일상·직업·사회 역할 상실

  • 정신질환 당사자: 증상 관리 이후 삶의 구조 붕괴

이 공백을 메우지 못할 때, 진단은 설명이 되지만 회복은 일어나지 않는다.

dec639633ce4e3c02d451234c56cd157_1765848239_4551.jpg

미국 공공 시스템에서 작업치료가 맡는 ‘진단 이후 단계’. ©Unsplash의ThisisEngineering

 

미국 공공 시스템이 주목한 질문: “진단 이후, 누가 함께 가는가”

미국의 공공 시스템 특히 Medicaid, IDEA(장애인교육법), 지역사회 기반 서비스는 비교적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뤄왔다. 그 중심에 있는 전문직이 바로 작업치료사다.

미국에서 작업치료는 단순한 기능 훈련을 넘어, Post-diagnostic care, 즉 진단 이후 단계의 삶을 재구성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구체화된다.

  • 이 사람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고 끝내는가

  • 학교·직장·가정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

  • 무엇이 참여를 가로막고 있으며, 무엇이 가능성을 열어주는가

작업치료는 진단명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occupation)’을 중심에 둔다.

전환기 케어(Transition of Care), 작업치료의 핵심 무대

미국에서 작업치료가 가장 강하게 개입하는 지점 중 하나는 전환기(Transition)다.

  • 병원 → 가정

  • 유아기 → 학령기

  • 학령기 → 성인기

  • 치료 중심 → 자립 중심

이 전환기에서 작업치료사는 의료·교육·복지 시스템을 가로지르는 연결자(coordinator)이자
개인의 일상을 다시 설계하는 실천적 설계자로 기능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발달장애 아동의 경우, 진단 이후 학교에서 ‘배움에 참여하는 방식’을 조정한다.

  • 뇌손상 성인의 경우, 퇴원 이후 직업·가정 역할을 재구성한다.

  • 정신질환 당사자의 경우, 증상 관리 이후 일상 루틴과 사회적 관계 회복을 지원한다.

이 과정에서 작업치료는 치료실을 벗어나 삶의 현장으로 들어간다.

한국의 구조적 질문: 우리는 왜 진단에서 멈추는가

한국의 시스템은 진단에 매우 능숙하다. 그러나 진단 이후 단계는 종종 개인과 가족의 몫으로 남는다.

진단 이후 서비스는 분절되어 있고, 의료·교육·복지 간 연결은 약하며, ‘일상 참여’는 정책 언어에서 거의 사라져 있다. 그 결과, 치료는 이어지지만 삶은 이어지지 않는다.

작업치료가 한국에서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작업치료는 진단 이후의 삶을 다루지만, 정책은 여전히 진단 이전과 진단 그 자체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진단 이후를 설계하지 않으면, 회복은 일어나지 않는다

진단은 설명일 뿐이다. 회복은 설계에서 시작된다. 미국 공공 시스템이 작업치료를 통해 보여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진단 이후의 삶을 책임지는 구조가 없으면, 진단은 반쪽짜리 정책이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진단을 얼마나 잘 내리느냐가 아니라, 진단 이후의 삶을 얼마나 잘 설계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가? 그 질문의 중심에, 작업치료가 있다.

정책적 시사점

  • 진단 이후 단계(Post-diagnostic care)를 정책 개념으로 명확히 설정할 것

  • 전환기 케어에서 작업치료의 제도적 역할 확대

  • 치료 성과가 아닌 참여 성과(Participation outcomes)를 정책 지표로 도입

참고 자료 (정책·연구 기반)

  • American Occupational Therapy Association (AOTA). Role of OT in Transition of Care

  • IDEA (Individuals with Disabilities Education Act), USA

  • CMS Medicaid Waivers & Community-Based Services

  • World Health Organization. Rehabilitation 2030: A Call for Action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