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뉴스 김경식 칼럼니스트】 올여름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장마와 폭염.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불편한 계절이 아니라, 생존을 위협하는 재난이다. 특히 장애인에게 장마와 무더위는 단순한 계절적 불쾌함을 넘어 구조적인 위험을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재난의 이름으로 드러나는 ‘장애인의 취약성’
장애인은 재난에 가장 먼저 노출되지만, 가장 나중에 고려되는 집단이다. 장마철 집중호우로 인한 지하주거 침수, 경사로 미끄러짐, 휠체어 접근 불가능한 대피소, 시청각 정보의 부재는 장애인에게 재난 자체보다 더 큰 위협이 된다.
폭염 시에는 냉방 설비가 없는 열악한 임대주택, 에너지 요금 부담으로 인한 에어컨 사용 자제, 신체 조절 기능의 어려움으로 인한 체온 상승 위험, 이동권의 제한으로 인한 냉방시설 접근 곤란 등이 중첩된다.
2022년 여름, 서울 관악구 반지하에 거주하던 발달장애 가족이 침수로 고립되어 숨진 사건은 단지 ‘주거 문제’가 아니라 기후 재난 속에서 장애인이 구조적으로 방치되는 현실을 보여주는 비극이었다.
장애인의 기후 재난은 ‘개인 문제’가 아니다
기후재난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만, 그 강도는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다르게 작용한다. 장애인은 물리적 이동의 제약, 감각 정보의 수용 제한, 재난 정보 접근의 장벽, 경제적 불평등, 지역 인프라의 취약성 등 다차원의 요인으로 인해 기후위기에 훨씬 더 취약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재난 대응 정책은 ‘비장애인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다. 대피소의 접근성, 재난방송의 자막·수어 지원, 장애 유형별 피난 계획 수립 등 장애 특성과 개별적 지원이 전제되지 않은 정책은 실질적 무용지물이 된다.
이처럼 장애인의 기후위기 취약성은 신체적 특성과 제도적 무관심이 교차하여 발생하는 구조적 불평등이다. 이는 개인의 적응 문제로 환원되어선 안되며, 정책적 불평등의 문제로 공론화되어야 한다.
재난 대응 선진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미국 연방재난관리청(FEMA)은 2010년 이후 재난관리계획 수립 시 장애인 통합 계획(Whole Community Planning)을 의무화했다. 특히 지역사회 기반의 Disability Integration Specialist를 지정해 대피소 내 접근성 확보, 장애인 동반 가이드, 의사소통 보조기기 제공, 수어 통역 등을 체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일본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재난 속 장애인 피해가 심각하게 드러나면서 모든 지방정부에 ‘특별지원이 필요한 자 등록제’를 도입했다. 장애인을 포함한 재난 취약계층은 사전 등록 시 긴급 상황 발생 시 지자체 직원이나 자원봉사자가 우선 구조하거나, 이동 지원을 제공한다.
스웨덴은 복지부와 민방위청이 공동으로 재난빈곤화 예방 매뉴얼을 마련하고, 특히 장애인 등 취약계층에게는 재난 이후 자산 손실 보전, 이동 보조기기 긴급 재지급, 대체 주거 연계, 긴급 소득지원 등의 사회안전망을 사전에 설계해 적용하고 있다.
호주에서는 장애인 고립 방지를 위해 ‘Get Ready Toolkit’을 배포하고, 발달장애인을 위한 그림형 피난 안내서(Visual Evacuation Guide)를 지역별로 제작해 배포한다. 모든 공공대피소는 감각 민감자를 위한 조용한 공간과 점자/시각장애 키트, AAC 기기를 구비하고 있다.
장마와 폭염 속 ‘생활권’으로서의 위기
특히 저소득 중증장애인의 경우, 에너지 빈곤과 주거 취약이 겹친다.
임대주택 중 많은 가구는 단열 불량, 에어컨 미설치, 반지하 및 고지대 진입의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복지관이나 무더위쉼터로 이동조차 어려운 경우가 많다. 또한 많은 지자체가 설치한 무더위쉼터는 휠체어 접근이 어렵거나 운영시간이 제한, 냉방이 약하거나 공간이 협소해 사실상 이용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발달장애인, 정신장애인처럼 인지나 감각 조절이 어려운 장애인의 경우, 폭염에 노출되더라도 위험인지나 신고 자체가 어렵다.
냉방기기가 고장나도 이를 요청하거나 대응하지 못하는 사례는 전국 곳곳에 존재한다.
재난과 가난의 악순환 '재난빈곤화'란 무엇인가
기후재난은 물리적 피해를 넘어서, 빈곤의 악순환을 강화한다. 이른바 ‘재난빈곤화(Disaster-induced Poverty)’는 재난이 취약계층의 자산·건강·사회망을 무너뜨려 더 깊은 빈곤으로 밀어 넣는 과정을 말한다.
장애인에게는 이 현상이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휠체어가 침수로 파손되거나, 활동보조인이 도움을 제공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거나, 의료기관의 이용이 제한되거나 주거 공간이 파괴되었을 때 대피소에조차 갈 수 없는 경우, 이러한 재난 피해는 곧 의료비 증가, 돌봄 단절, 소득 손실, 주거불안정의 연쇄 고리로 이어진다.
결국 재난은 장애인에게 물리적 위험뿐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추락을 가속화하는 구조적 위협인 것이다.
기후위기 시대의 장애인 권리 중심 재구성
장애인도 똑같이 삶의 권리를 지닌 시민이며, 재난 속에서도 존엄을 보장받아야 할 주체다. 이를 위해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은 대책이 시급히 필요하다.
장애인 대상 기후 재난 대응 매뉴얼의 전면 재설계 (장애 유형별 맞춤 포함), 기후취약계층 선별 시 장애인 포함의 법제화, 에너지 복지 확대: 중증장애인 가구 대상 냉방비·전기료 실질 지원, 보조기기용 전력 우선 보장, 접근 가능한 무더위쉼터 확대 및 휠체어·보행약자 맞춤형 쉼터 설계, 장애인 당사자 참여 기반의 기후 적응 정책 수립, 장애인 활동지원 서비스의 ‘기후 재난 대응 기능’ 강화, 재난빈곤화를 방지하는 복지-재난 연계 제도 구축이다.
재난이 드러내는 사회의 민낯
기후위기는 거대한 자연현상이자, 사회의 불평등을 드러내는 확대경이다. 그 재난 속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이들이 누구인지 묻는다면, 그 답은 분명하다.
장애인, 노인, 아동, 이주민, 빈곤층, 이들은 기후위기 시대의 ‘재난 취약계층’이며, 권리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다.
우리는 장애인을 단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기후위기 대응의 중심에 놓여야 할 권리의 주체로 바라봐야 한다.
재난은 단지 자연의 일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이 낳는 불평등의 결과이기도 하다. 기후정의(climate justice)는 단지 탄소를 줄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대한 윤리의 문제다.
이제 재난 대응 정책은 더 이상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설계되어선 안 된다.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시민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구축해야 할 기후복지국가의 핵심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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